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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경통신원

‘공간, 청년, 활동할 권리’ 세 가지 요소로 살펴본 마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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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디
2017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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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마을 ⓒ성북마을기자단 황선영

내년이면 성북구에서는 마을자치 시범사업이 시작된다. 마을계획은 마을자치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통합되고 또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모색된다. 마을자치는 지난 5년 동안 이어 온 마을공동체 사업의 성과를 모아 협치라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농업 공동체와는 다른 의미로 도시 안에서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는 ‘마을’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호명되고, 자발적으로 공동체 조성을 위해 노력하는 주민들을 발굴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립하고.. 그렇게 역량을 키운 주민들이 다시 새로운 자원과 가지를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을은 개인과 공동이 발전하는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로 자라왔으며 앞으로도 우리 사회 변화에 기여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큰 역량의 원천이다. 이 힘이 앞으로도 유지되고 더욱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앞으로 마을 활동이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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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마을 ⓒ성북마을기자단 황선영

교과서에 실린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기억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다. 30년대 농촌 계몽 운동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 내 우리 문학사의 고전이 된 이 작품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좁고 낡은 야학 교실에서 밀려난 아이들이 뽕나무 가지를 타고 기어 올라가 교실을 들여다보고, 교실 안팎에서 함께 목이 터지도록 글을 배우는 장면이다. 낙후되고 피폐한 농촌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농촌에 투신한 청년들이 야학을 운영하고 싶어도 변변한 공간조차 마련할 수 없어 동네 머슴방이나 나무 그늘 아래를 돌아다니는 현실에 부딪힌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 채영신은 이를 악물고 직접 흙을 짊어져가며 마을 회관을 건립하지만 결국 거기서 얻은 과로로 세상을 뜨고 만다. 1930년대 소설을 읽다 보면 양극화나 투기 경제, 고학력 실업 같이 참으로 현실과 많이 닮은 부분들을 마주칠 수 있는데 채영신의 운명이야 말로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싶은 우울한 연상으로 요즘은 심훈의 상록수가 자꾸 생각이 난다. 

그만큼 마을 사업에서 <공간>은 절실한 문제이다. 주민들을 조직하고 사업을 운영할 터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할 만한 시설, 안심하고 아이들을 놀게 하거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공유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마을 활동가들은 주민 앵커 시설 건립을 염원으로 삼지만 보통 사람들의 수입에 비해 턱없이 높아진 지대 혹은 임대료로 인해 공간은 결코 쉽게 해결될 숙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관계망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의 제공”이라는 필요가 단지 높은 임대료 때문에 그야말로 ‘꿈도 못 꿀 일“이 되어 버린 이 현실은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왜 우리는 공간을 확보하는데 이토록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상업적 목적, 임대 수익을 위해서만 공간은 존재해야 할까?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왜 모든 땅과 건물은 임대 혹은 매매를 통한 수익을 위해서만 운영되어야 하는가. 아파트마다 노인정과 놀이터를 설치하는 것처럼 주민 사랑방 설치를 한 동네에 하나씩 의무화할 수는 없을까? 공유되는 터전이 “팔 수 있는 땅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임대 외에 다른 가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는 없을까? 지대 과잉의 문제는 물론 법과 제도의 변화가 핵심이지만 그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반드시 인식의 변화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공유 공간을 주민들이 필요로 한다면 그것을 필수로 정착시킬 수 있게, 그러한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게 요구해야 하고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공간의 권리와 가치를 ‘파는 사람’에게서 ‘이용하는 사람’에게로 옮기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임대차 수입을 위해 운영되지 않는 공간은 모두 죽은 공간인 것처럼 인식하는 자체가 문제 아닐까? 왜 모든 아파트에는 모든 입주민들이 쓸 수 있는 공용 공간이 있으면 안 되는가? 왜 모든 마을에 사랑방이 있으면 안 되는가? 동 주민센터라든지 구립 도서관, 구청 등의 행정 기관에는 반드시 시민들을 위한 공유 공간을 설치하도록 제도화할 수 없는가? 영국의 경우처럼 주민들이 오래 이용해 온, 필요성이 인정되는 공간들은 주민들이 스스로 운영권을 얻을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법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공용 공간에 대한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마련할 수는 없는가? 상속받는 건물에 대해 상속세 대신 일정 기간의 공용 임대 방안은 생각해 볼 수 없는가? 혹은 주민들이 필요한 공간을 요구할 때 그것을 기부받거나 국가가 매입해서 운용할 수 있도록 할 수 없는가? 왜 땅의 필요성을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는가?

주민 커뮤니티 공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시민 자산화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그 이전에 공간이 공유되는 게 마땅하는 인식을 먼저 심어 보면 어떨까? 우리가 기본적인 삶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공간에 대한 권리도 요구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법적, 제도적 변화와 만나면 사회의 변화를 더욱 촉진시킬 수 있지 않을까?


부유하는 청년들, 새로운 정치의 시작
공모 사업 위주의 마을 공동체 사업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다. 성미산 마을의 공동 육아를 모델로 시작한 현재의 마을 사업이 갖는 가장 명확한 한계 중 하나는 ‘울력’, 즉 처음부터 남는 자원의 공유를 기본 개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시간에 누군가의 손이라는 식으로 남아도는 자원들을 맞바꾸는 개념으로 시작한 공동체 사업이다 보니 자연히 노동의 범주로 포섭되지 않았다. 물론 울력이라는 형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남에게 공짜로 제공할 만한 여유 자원이 없는 사람들은 애초에 끼어들 수 없다는 강력한 한계를 갖고 있다. 나눌 것이 없는 사람은 시혜의 대상이 되거나 배제될 뿐이다. 서로의 비슷한 점을 중심으로 뭉치다 보니 다른 사람을 배제하게 되는 공동체의 모순. 그래서 가장 자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먼저 배제되는 모순은 이제 너무나 확연하다.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로 유입되어 정주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가장 배제되기 쉬운 대상이다. 지자체 단위로 시행되는 공동체 사업에서 이들은 주민으로 잡히지 않는다. 이들이 가진 것은 오직 노동력 뿐인데, 그들의 노동력은 임금과 바로 교환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노동력을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 사업이 계속 이어지는 한 우리는 영영 이들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마을공동체 활동은 이미 전문화된 고급 인력을 요구하고 있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기존의 제도 안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공동체에 소속되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서로가 만날 필요성이 있는데도 접점을 찾지 못해서 맴돌고 있는 사람들을 흡수할 수 있는 제도적 길이 조금이라도 열리면 이들이 마을로 쏟아져 들어와서 새로운 활력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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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할 권리
한 마을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공동 시설, 그리고 네트워킹을 ‘전문적’으로 해낼 수 있는 젊고 에너지 있는 활동가들. 이런 사람들이 한 마을에 하나씩 있다고 상상해 보자. 공모 사업이라는 모델을 통해 현재까지 마을에서는 많은 주도적인 주민들이 발굴되었다. 이제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협력하고 발전하는 가운데 거버넌스의 주역으로 나아가야 할 단계, 한 단계 도약해야 할 단계가 왔다. 안정된 앵커 시설의 안정된 활동- 네트워크 활동으로 생활할 권리를 얻을 수 있는 활동가-가 있다면 이 단계가 더욱 안정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아직까지도 기존의 방식, ‘공모 사업’을 통해 ‘발굴’된 주민(즉, 지역 내에서 안정적인 자기만의 거주지가 있고, 물질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과 나눌 만한 여유가 있고, 시간도 있으며, 그 동네에 오래 거주해서 네트워킹의 핵심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자발적인” 주민)이 아직도 많아서 그들을 끌어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 혹은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면, 어디까지나 자발적이고 여유로운 활동으로서 별도의 노동 대가도 지불하지 않아도 되니 어떤 면에서는 이득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러한 여건을 다 갖춘 주민들이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 주민들은 지난 5년간의 공모사업으로 어느 정도 발굴된 만큼, 마을 네트워크 사업의 다음 관건은 지금까지 공동체 유입을 어렵게 했던 ‘문턱’을 낮추는 일이 아닐까?

안정된 공간과 활동의 여건이 제공되면 더욱 활발한 네트워킹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마을이 있음을 적어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네트워킹의 노력에는 사람들의 자발성도 중요하지만 자발성을 유지하는 여건을 지원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 마을에 대한 지원이 아닐까? 우리가 최근에 경험한 것처럼, 때로는 한 사람을 잃는 것이 한 마을을 잃는 일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마을공동체의 지속과 발전에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로 청년, 공간, 활동할 권리를 꼽아 보았다. 사실 이러한 주제들은 이제까지 꾸준히,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들이다. 마을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나가는 이때 이러한 질문들, 마을을 확장시킬 수도 쇠퇴하게 할 수도 있는 근본적인 질문들은 던져지는데 계속해서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질문은 멈추고 발전도 멈추고 말 것이다. 현장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이러한 말들이 위 아래로 전달되고 공명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고 질문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행정 기관이 되었든, 중간지원조직이 되었든, 시민사회가 되었든, 공동체 조직이 되었든, 활동가들이 되었든 마을이라는 터전에 먼저 자리잡은 사람들은 앞으로 이 마을의 유입될 사람들을 위해 더 넓고 큰 질문을 던지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마을사업도 유의미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기반들을 갖추려면 제도적, 행정적, 법적인 변화가 필수이지만 그 이전에 주민 역량을 강화하거나 공익에 대한 인식을 갖추는 작업에 마을 사업이 함께 발을 맞추면 더욱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성북마을기자단 황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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