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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경통신원

도심 속 쉼터, 옛집에서 봄을 만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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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북마을
2019년 3월 29일

삭막하고 황량한 잿빛 콘크리트 빌딩 숲 사이에도 봄은 찾아온다. 길가 상점들은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각종 상품들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 봄을 진짜 남다르게 만끽하고 싶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공간이 성북마을에 있다. 창가에 앉아 가만히 졸고 있는 ‘오수(午睡)노인’의 옛집.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도심 가운데에서 발견한 여유와 사색의 공간이다. 최순우 옛집으로 떠나보자.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같은 저서로 유명한 혜곡 최순우는 1945년 개성시립박물관 서기를 시작으로 1949년 서울 국립박물관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 이후 평생을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한 문화인이다.

6·25사변 중에 간송 전형필과 함께 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를 목숨을 걸고 부산으로 안전하게 운반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전시 활동을 통해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진흥에 크게 이바지한 일등공신이다. “한국 미술은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다우며 미술품에 잔재주를 부리면 한국 미술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라는 그의 생각은 지금의 성북동 인근에 자리한 옛 살림집 뜰 안으로 들어설 때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된다.

그가 가족과 더불어 살았던 옛집 문을 열고 들어서 보자.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집의 평면 형태는 ‘ㄱ자형’ 본채와 ‘ㄴ자형’ 바깥채가 마주 보고 있는 ‘튼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기둥머리에는 소로와 부연 등으로 외관을 장식,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서울 일대에서 유행한 전형적인 근대 한옥의 모습을 보여준다. 혜곡은 바로 이 집에서 그의 명저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등 선생이 돌아가신 뒤 엮인 책에 실린 글을 직접 저술했다.

무엇보다도 이 집에서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현판이다. 집의 앞면과 뒷면에 각각 한 개씩, 총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앞에 것은 혜곡 본인의 친필이고 뒤에 것은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리하면서 창고 구석에서 발견한 조선 후기의 명화가 단원 김홍도의 글씨를 편액으로 만들어 둔 것이다. 아울러 단원이 쓴 ‘오수당’의 친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한 《단원유묵첩》에 실려 있다고 하니 참고할 것.

전면의 현판에 낙관처럼 새겨진 ‘오수(午睡)노인’이란 글씨는 혜곡 최순우가 직접 지은 그 자신의 별명이다. 재미있는 대목은 가옥 후면에 건 김홍도의 글에서 드러난다. 현판에 새긴 단어, ‘오수당(午睡堂)’. 그러니까 혜곡은 김홍도의 글귀에서 자신을 엿보았던 것이 아닐까?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그의 옛 살림집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15길 9에 남아 있다. 이곳은 2002년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과 기증으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보존하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통해 오늘날까지 우리 곁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2004년도에 재단법인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발족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1호로서 ‘최순우 옛집’이 드디어 일반에 공개될 수 있었다.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한편 성북마을에는 최순우 옛집 외에도 꼭 한 번쯤은 들려봐야 할 또 다른 근현대 시민문화유산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성신여자고등학교 후문 옆에 자리한 조각가 권진규의 아틀리에다. 춘천고등학교를 나와 일본 명문 무사시노미술대학교를 졸업한 이래 ‘자소상’ 등의 얼굴 조각으로 후대에 더욱 널리 이름을 떨쳤던 선생이 생전에 손수 집을 지어 작업실로 완성했다는 공간이다.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아틀리에 내부에 들어서자, 허리부터 천장까지 높다란 창문이 이어지며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흙을 빚어 불에 굽는 전통 테라코타에 접목한 건칠 작품으로 생전에 우리나라보다 일본 등 해외에서 더욱 주목받았다는 권진규는, 서양풍 추상 조각을 추종하던 국내 조각계에서는 그 독자적인 작품 세계만큼이나 ‘이단아’로 취급받았다.

아틀리에의 상당히 높은 축에 속하는 천장은 그가 대형 기념상 제작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생활고 속에 비극적으로 숨을 거둔지 30여 년 뒤, 권진규가 졸업한 일본의 미술 명문 무사시노미술대학교에서 개교 80주년을 앞두고 학교 역대 졸업생 가운데 최고 작가를 선정한다. 공모 심사 결과, 한국의 조각가 권진규가 당당히 뽑힌다.

그리고 2006년, 오빠의 사후에 아틀리에를 맡아 관리해오던 그의 여동생이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이 공간을 기증한다. 그렇게 비련의 천재를 품었던 조그만 아틀리에는 아픈 역사를 지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후 보수와 복원 공사를 거쳐 지금은 희망자의 사전 방문 신청을 받아 한 달에 한 번 정기개방을 진행한다고. 현재는 예술가 입주 프로그램으로 조금씩 활기를 찾고 있다는 이곳에서는 강연과 음악회가 열려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어진 세상의 뒤늦은 인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9년 가을에 도쿄국립근대미술관과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그의 작품을 선보이는 특별전까지 개최된 것이다.

지루한 도심을 벗어나 잠시나마 만끽하는 따사로운 여유, 옛집 곳곳을 장식한 전통 민예품의 소담한 자태도 이 두 공간을 자꾸 찾게 한다. 다가오는 봄날, 조금은 더 특별한 나만의 봄맞이를 하고 싶다면, 성북마을에 자리한 두 시민문화유산, 최순우 옛집과 권진규 아틀리에를 꼭 찾아보기를 권한다.

[사진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 글 성북마을기자단 김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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