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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김곡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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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무리
2019년 12월 19일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
Fifteen Questions on ‘What is Cinema?’

영화가 동굴을 탈출하지 못한 게 아니다.
그는 동굴에 머물기를 스스로 선택했다.
그에게 동굴 안은 이미 이 세계의 일부가 아닌
또 다른 세계 전체로서, 탈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닫음의 예술이다. 동시에 개체화의 예술이다.

지은이 김곡 | 정가 18,000원 | 쪽수 328쪽
출판일 2019년 11월 29일 | 판형 사륙판 무선 (130*188) |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총서명 Cupiditas, 카이로스총서 61
ISBN 978-89-6195-219-4 03600  | CIP제어번호 CIP2019040667
도서분류 1. 영화 2. 철학 3. 미학 4. 예술 5. 정치

이 책은 『투명기계』의 보론처럼 의도되었다. 거기서 동원되는 세부사항들에 비해 그 대전제에 대한 논의는 인색했다는 나름의 판단에서였다. 그만큼 이 책은 영화의 태생적인 근본전제를 다루며, 그에 대한 질문이자 답변이다. 심히 근본적이어서 우리가 종종 잊는, 혹은 다 알고 있다고 종종 착각하는 ‘영화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 말이다.
영화에 관한 많은 편견은 저 질문의 공백에서 자라난다. 영화는 다른 예술의 종합이라느니, 영화는 개인의 표현이란 점에선 예술이고 대중의 수요충족이란 점에선 상업이라느니, 한술 더 떠서 예술영화는 진실을 추구하는 반면 상업영화는 환영을 추구한다느니 하는 편견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편견들을 면밀히 뜯어보면 거기엔 라는 오래된 전제가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되며, 이는 이 책이 밝히려고 하는, 또 이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오늘도 극장에서 몸소 경험하고 있는 영화의 존재방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 서문 중에서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 간략한 소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영화는 문학, 사진, 미술과 어떻게 다르기에, 관객은 책상 앞이나 갤러리 안에서 비명을 지르진 않아도, 스크린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 이 책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보다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문제로 전환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영화의 몸무게는 몇 kg인가?’ ‘영화의 나이는 몇 살인가?’ ‘영화의 살은 몇 겹인가?’ 같은 엉뚱하지만, 실질적인 질문들 말이다. 작가의 전작 『투명기계』를 위한 보론 같은 책이다.

의 오드리 헵번이 아직 프레디 크루거나 T-1000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그 무대를 무한히 연장시키기로 마음먹는다면, 우리 공주님은 무한한 변신을 거듭하여, 진화론을 부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드리 크루거나 A-1000으로 진화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미디어학자들의 짓궂은 질문에 대한 영화의 응답은 이것이다. 영화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이미 그 자신이 미래 시제이기 때문이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15가지 질문』 상세한 소개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불편한 질문

영화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화두는 사실 불편하다. 그 대답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반대로 너무 많은 대답이 이미 나와 있고, 또 그들 중 몇몇은 정답처럼 굳어져서 더는 질문할 필요가 없어져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영화감독이자 철학자인 김곡에 따르면, 영화에 대한 많은 편견은 바로 그런 질문의 공백에서 자라난다. 영화는 사진, 문학, 연극 같은 타예술을 종합한 종합예술이라느니, 예술영화는 진실을 추구하는 반면 상업영화는 환영을 추구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저자에 따르면 영화에 대한 편견들이다.

이 책은 이런 편견들이 모두 영화의 본질을 간과한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영화의 본질을 ‘연장성’(extensiveness)이라는 화이트헤드의 개념에서 찾는다. 이에 따르면 영화의 본성은 ‘연장적’이며, 고로 영화는 ‘나눠지기 위해서만 이어지고 이어지기 위해서만 나눠진다.’는 본성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종합예술’이기는커녕 ‘분석예술’이다. 또한 ‘환영’을 추구하기는커녕 ‘분위기’를 추구하는 예술이다.

영화는 분위기를 추구한다

저자에 따르면 분위기는 단지 환영이나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연장성에 대한 느낌으로서, 극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얼마든지 나눠지고 또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실질적 예감이자 감각이다. 그것은 사진, 문학, 연극, 미술 등의 다른 예술매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추구해오던 어떤 것이나, 영화가 유독 잘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책이 실증적 사례로 드는 예가 흥미롭다. 유독 영화에서만 관객이 비명을 지른다는 것이다. 사진, 문학, 연극, 미술, TV에서 관객은 아무리 감동을 해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사진, 문학, 연극, 미술, TV가 영화만큼 강렬한 분위기로 관객을 옥죄진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컷만으로도 사진, 연극, 미술보다 갑절의 분위기를 단숨에 형성해내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20세기 태동기부터 오늘날 멀티플렉스까지도 영화가 간직해왔던 그만의 특출난 재주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송신자-메시지-수신자’라는 플라톤주의적 구도

그렇다면 우린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느니,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느니 하는 식의 그릇된 편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책은 그런 편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래된 공통전제에 입각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크린 뒤에 송신자가 있고, 매체는 메시지이며, 관객은 그 수신자가 된다는 ‘송신자-메시지-수신자’의 구도다. 분명 그 주범은 동굴의 우화를 말했던 플라톤이지만,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린 ‘송신자-메시지-수신자’라는 플라톤주의적 구도를 은근슬쩍 교육받고, 또 아무런 의심 없이 남용하면서, 영화를 체험해야 할 분위기보다는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이러한 사고법은 이미지를 관객 스스로 뛰어드는 또 하나의 실재보다는 비평가나 전문가가 대신 해석해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숨은 메시지로 만든다.

영화는 옹알이를 반데카르트적으로 했고, 걸음마는 반플라톤적으로 했다. 그러나 결국 그를 다시 플라톤주의로 되돌려 보내는 것은, 모세를 참칭하며 송신자의 메시지를 별점으로 채점하고 또 심판하려는 비평의 언어였다고 이 책은 쓰고 있다.

영화는 몇 kg인가, 영화는 몇 살인가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분위기라는 본성을 고려하여 좀 더 실질적이고 체감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다시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숨어있던 몇 가지 질문들을 ‘분위기’를 촉매제로 해서 추출해내고, 그것을 각 챕터의 제목으로 삼는다. 가령 ‘영화의 몸무게는 몇 kg인가?’, ‘영화의 나이는 몇 살인가?’, ‘영화의 살은 몇 겹인가?’, ‘영화의 밥상은 몇 그릇인가?’ 등등의 질문이 그것이다.

영화의 몸무게를 묻거나, 영화의 나이를 묻는 질문들은 일견 엉뚱해 보인다. 그러나 ‘분위기’라는 영화의 본성을 고려할 때 엄정한 질문들이 된다. 분위기는 이미지를 동굴 안의 실재로 만들면서, 그 안에 위치한 육체를 촉구하고 압박하는 가능성이나 힘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몇 kg인가, 영화는 몇 살인가, 영화는 몇 겹인가, 영화는 몇 그릇인가 등의 엉뚱한 질문들을 분위기의 질량, 분위기의 시간성, 분위기의 다원성, 분위기의 일원성을 묻는 질문들로 전환하면서, 이 책은 영화는 ‘군중의 예술’이라고 결론 짓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 분위기의 질량을 군중의 무게로부터 빌려오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많은 철학자나 영화이론가들의 개념을 동원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론서가 아닌 것은, 이처럼 영화를 하나의 감각이자 질량감으로 사유하는/느끼는 방식 때문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추천사

김곡은 흡사 영화를 보는/만드는 것처럼 영화와 더불어 사유한다. 이는 영화에 ‘대해’ 사유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영화라는 분위기에 그저 한껏 몸을 담그는 행위로서의 사유. 이 책에는 여러 이름과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이론서나 비평서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좋은 비평을 위해서는 이 책이 하지 않은 것만 골라서 하면 된다고 솔직하게 충고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이론과 비평이 얼마간 거리를 두고 다루어 왔던 영화에 대한 온갖 종류의 사유들을 예측불허의 방식으로 몽타주하고 있는 ‘영화-책’이다. 물론 그 방식은 김곡 자신이 영화의 독특한 본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거리를 연장하기 위해서만 나누고, 또 나누기 위해서만 연장하는 능력”을 모방하고 있다. 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라는 김곡의 주장은 자신의 책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이 책은 읽기보다는 겪기를 요구한다.

지은이 소개

김곡 (Kim Gok)
본업은 영화감독이다. 공동작업자 김선과 함께 ‘곡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등으로 베니스영화제, 부산영화제, 로테르담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상업영화로는 같은 장르영화들을 연출하고 있다.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으로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와 소송 투쟁하기도 했다. 『투명기계』(갈무리, 2018)를 썼다.

책 속에서 : 영화란 무엇인가?

1장 영화는 빛나는가? (10쪽)
영화에 대한 오해 중 가장 으뜸은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생각이다. “본다”는 것의 외연을 아무리 청각과 공감각, 3D와 4D로 확장한들 이 오해는 쉽사리 타협되거나 해소되진 않을 터인데, 왜냐하면 영화를 본다는 저 생각은 보여지는 것과 보는 자, 나타나는 대상과 인식하는 주체 사이의 거리를 전제하며, 무엇보다도 그 둘 사이에 가로놓여져야 할 매개로서의 빛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3장 영화는 문학인가? (31쪽)
가장 오래된 예술형태인 문학을 영화는 거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00살도 안 된 신참에게 너무 먼 선배는 존경보다는 무시가 더 쉬운 대처일 테니까. 그래서 영화가 편집술을 완성하자마자 문학을 기꺼이 초빙했을 때, 그것은 존경심보다는 이기심의 발로였다. 영화는 문학을 전적으로 실용적인 수준에서만 수용한다.

5장 영화는 TV인가? (67쪽)
영화는 사진에 신세 졌고, 문학을 질투했고, 연극과는 경쟁했다. 비록 태동기에 있던 일들이나, 이것이 여전히 사실이라면 오늘날 영화가 경쟁하는 것은 사진도, 문학도, 연극도 아니라 TV일 것이다. 왜냐하면 TV야말로 현대 매체 중 가장 지독한 연극성으로 무장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6장 영화감독은 실재하는가? (90쪽)
영화감독의 이름은 고유명사가 될 수 없다. 그때 그곳에서 접촉했던 모든 것을 지시하는 대명사가 되는 능력 말고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브랜드네임이 빵을 맛있게 하는 게 아니라 빵이 맛있으니 브랜드네임이 있는 것이다. 영화는 무수한 제빵사를 갖는다.

9장 멀티플렉스에도 비가 오는가? (156쪽)
영화는 언제까지 버틸 것인가. 미디어학자들의 이 짓궂은 질문에 대한 영화의 응답은 이것이다. 영화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 이미 그의 분위기가 미래 시제이기 때문이다. 여중생이 지하철에서도 비명을 지른 것은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휴대용 극장 안에 있었음을 의미하지, 결코 극장의 폐업을 의미하진 않는다.

11장 영화는 몇 kg인가? (207쪽)
네그리는 개인적 필요노동의 감축이 집단적 필요노동의 확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동굴 안의 죄수와 분위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터다. 관객이 움직일 필요가 줄어드는 만큼, 집단적 공개체화의 필요는 불어난다. 그렇게 관객은 기꺼이 분위기에 감금되어 변신노동의 자발적 죄수가 된다.

13장 영화는 몇 겹인가? (235쪽)
위장은 영화의 특성이고 또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위장이 없는 문학은 있다(내적 독백이 심한 경우). 위장이 없는 연극도 있다(추상화가 심한 경우). 위장 없는 사진도 있다(보도사진의 경우). 위장이 없는 회화도 있다(색면회화의 경우). 그러나 위장이 없는 영화란 없다. 모든 영화는 위장한다. 심지어 실험영화도, 다큐멘터리도 예외는 아니다.

15장 영화는 영원한가? (305쪽)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장르영화나 작가영화, 극영화와 실험영화, 진보적인 영화와 고전적인 영화, 때깔 나는 영화와 후진영화, 재미있는 영화와 지루한 영화, 이들 모두는 평등하다. 그 과정이 곧 그 자신의 실재가 된다는 점에선 동등한 변신기계들이다. 당신 또한 카메라를 드는 순간 이 시민권을 바로 발부받는다.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투명기계』(김곡 지음, 갈무리, 2018)
영화가 또 하나의 철학일 수 있을까? 단지 철학적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영사되고 감상되고 심지어 편집되는 빛의 철학일 수 있을까? 는 그 대답이다. 라이프니츠, 니체, 화이트헤드, 맑스 등을 가로지르며, 소비에트, 네오리얼리즘, 누벨바그, 뉴저먼 시네마 등 영화사의 굵직한 사조들을 아우른다. 장르영화(공포, SF)뿐 아니라 실험영화(애니메이션, 구조주의)도 다룬다. 한국영화도 놓치지 않았다. 유현목과 베르히만, 임권택과 타르코프스키의 비교뿐만 아니라, 한국 뉴웨이브와 신파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 접근을 선보인다.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종말로 파악할 만큼 급격한 예술의 위치와 양태변화는 항상 새로운 주체성의 대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단토, 가라타니 고진, 벤야민 등의 예술종말론들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예술적 변화를 예술종말로 파악한 과거의 관점들(헤겔, 맑스)을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다른 맥락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영화와 공간 ― 동시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학적 실천』(이승민 지음, 갈무리, 2017)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어제와 오늘을 ‘공간’을 키워드로 하여 비평하고 재편성하였다. 이 책은 ‘왜 공간이 부상하기 시작했을까?’에 대한 거시적 물음에서부터 ‘재개발 투쟁과 은폐된 역사를 파헤치는 비판 정신에서 출발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공간은 지금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라는 로컬적 질문까지 아우르면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역사를 공간으로 재편성하는 동시에 2010년 이후 부상한 영화의 공간(들)을 정리해서 공간의 의미를 펼치며 다양한 함의를 부여한다.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정병기 지음, 갈무리, 2016))
대선에서 경쟁력 있는 제3후보가 적어도 한 명이라도 출마한다면, 1,000만이라는 숫자는 유효 투표의 약 3분의 1에 해당해 당선 확정에 근사한 수치다. 2005년 이후 천만 관객을 넘은 한국 영화들은 권력과 관련되는 내용을 다루었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사회 부조리와 관련된 이슈들을 주로 다루었다. 1,0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한국 사회의 정치 문화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문화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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