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더위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런 날은 실내에서 즐기는 문화생활, 전시회도 좋다. 때마침 성북구에서 특별한 전시가 진행 중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무료 전시로, 전시 제목은 <지천명에 화답하다-시간을 담은 공간, 예술을 담은 시간>이다. ‘지천명’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고려대학교의 개관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다.
고려대학교에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도 현대미술 전시실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1934년에 설립된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현존하는 국내 대학박물관 중에는 가장 긴 역사를 지녔다고 한다. 지역 주민을 위해 무료로 개방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동안 고려대 박물관이 수집하고 정리한 한국근대현대미술 명작 130점을 볼 수 있다.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중섭, 천경자, 김진규, 김환기 등 근현대 작가의 작품도 100여 점이나 된다. 유명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어느 더운 7월 오후 그 현장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고대 앞에서 하차, 3분여를 걸으니 고풍스러운 느낌의 박물관 건물을 만날 수 있었다. 전시 작품이 많은 만큼 전시실도 1층에서 지하 1층, 3층과 4층까지 있어 순차적으로 관람이 가능했다. 박물관 내에 진입하면 바로 볼 수 있는 기획 전시는 1층의 조각 전시다. 고려대 박물관 근현대 미술 소장품 중 조각 작품만 전시한 공간으로 인조 잔디 사이에 나무, 돌, 금속 등의 여러 조각을 볼 수 있었다. ‘비상’, ‘전진’, ‘낙원’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작품들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너무 어렵거나 진지하지 않게 각자의 의미가 와닿는 것만 같았다.
‘호화로운 나날들 시간의 조각’이라는 주제로 열린 작품들은 조각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끌리는 뭔가가 있었다. ‘공간 속에 하나의 입체 형상을 창조하는 기나긴 시간을 깎고 다듬어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는 과정, 어쩌면 조각과 대학은 닮아있다.’는 문구도 마음에 들었다. 지하 1층 전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하 1층의 전시는 ‘미술을 품은 역사’라는 제목 아래 화려한 그림들이 펼쳐졌다. 수집 시대순으로 전시된 작품 중에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작가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이중섭, 천경자 화가 등 유명한 화가의 그림들이 가득한데, 누군가는 이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했다. 특히 광부 화가로 작품을 위해 강원도 탄광에서 3년간 광부로 생활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 황재형 작가의 작품은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지천명에 화답하다-시간을 담은 공간’, 전시가 특별한 것은 특정 화가의 작품에 집중되기보다는 근현대 대한민국 미술을 대표하는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한 장소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많은 한국 작가의 작품을 한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이동한 3층 전시장은 사람을 주제로 한다. ‘호화로운 나날들 그리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박물관이 소장한 근현대 미술작품 중 사람을 소재로 작업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초상화들이 많았다. 작가의 자화상으로 시작해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 중 남성의 초상화로 이어지다 소시민으로 연결되며 여인의 초상으로 마무리된다.
빨간 담벼락 앞에 웅크리고 앉아 돌을 만지작거리는 남자아이의 모습을 그린 ‘송용의 벽’도 은은한 여운이 남았다. 추운 겨울 공사장 인부들이 모닥불에 모여있는 모습의 ‘오용길의 모닥불’도 좋았고, 도시의 소시민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는 ‘이흥덕 작가의 지하철 사람들‘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소외되었던 계급 중 하나인 농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하는 이종구 작가의 ’UR-권씨‘와 ’명환 아저씨‘ 작품도 눈에 띄었다. 사람을 주제로 한 3층 전시장은 이 박물관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이었다.
고려대 박물관 4층 전시실에는 고려대 박물관의 현대 미술 컬렉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이자 교직원, 실질적으로 큐레이터 역할을 했던 이규호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코너다. 1973년 당시 고려대는 미술 관련 전공 학과가 없었는데도 대학박물관 최초로 현대 미술 전시실을 열어 주목받았다고 한다. 이번 고려대학교의 전시는 이규호 선생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장은 어느 인터뷰에서 “’지천명에 화답하다‘라는 이번 특별전의 전시명은 하늘의 뜻에 우리가 소장하고 함께 감동할 미술작품으로 답한다는 뜻을 담았다“라고 했다. 그만큼 정말 신중하게 접근한 특별한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이번 ’지천명에 화답하다‘ 전시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가볼 만한 전시였다. 미술을 몰라도 누군가의 그림을 보고 색다른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있다면, 이 지겨운 여름날의 시원한 울림이 되어 남을 것이다. 전시는 8월 19일까지 고려대 박물관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글/사진 성북마을기자단 박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