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시리즈의 마지막 여정이다. 남은 동네들을 세어 보니 장위동, 석관동, 월곡동 세 곳이 남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특별히 자전거를 타고 가 보기로 했다.
장위동, 석관동, 월곡동. 보통 이렇게 세 곳을 많이들 묶어서 생각한다. 지난 돈암동/길음동 편에서 언급했던 내부순환로가 놓이고 이어서 북부간선도로까지 생기면서 북부간선도로에 얽혀 있는 3곳의 동네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게 된 시점부터다. 보통 월장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 곳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마을단체 중 <월장석친구들>이 있어서 그렇게 굳어진 듯하다.
그래서 자전거 이동 루트도 월곡동-장위동-석관동으로 하여 다시 월곡동으로 돌아오는 루트다.
[장위동 – 고갯길 따라 재생하는 동네]
장위동은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오래 전부터 살았던 사람들에겐 ‘한때 장군촌이라 불리던 부촌’, 이사 온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사람들에겐 ‘왠지 묘하게 낙후된 곳’, 그리고 일부에게는 ‘서서히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
장위동에도 영광의 시절이 있었다.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오동근린공원 밑 “동방고개”이다. 위치상 서울의 동북쪽에 있는데 왜 동방고개인가 하면, 기업 삼성 때문이다. 삼성생명의 전 명칭은 동방생명이었는데, 이곳에서 자금을 대어 장위동 고개를 따라 큰 연립주택 단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주택단지, 당시 “고-급 맨-숀” 이라 했던, 동방주택이 지어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장위동 고개는 동방고개로 이름이 바뀐다.
그런 저택 중 한곳이 최근 성북구에서 매입하여 건축가 김중업 선생을 기념하는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이다. 이 주택의 내부로 들어가 보면 당시 동방주택이 얼마나 고급 주택이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긴 스테인드글라스와 큰 샹들리에, 그리고 벽난로까지. 세월이 지나도 고풍스러움은 여전하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고 하던가. 장위동은 조금씩 그 위치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유는 바로 교통인 지하철과 신흥 부촌의 등장이었다. 장위동은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하철이 지나가지 않고, 버스 노선도 지금 대비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게다가 시간이 흐르며 강남과 여의도가 활성화되고 많은 이들이 그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추가적으로, 비슷한 부촌인 성북동과 장위동은 크나큰 차이가 하나 있었다. 바로 “도심으로 나갈 수 있냐, 없냐?” 는 것. 현재의 교통 구도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지금의 창문여고를 기점으로 북서울꿈의숲으로 질러가는 월계로 차도가 생긴 것은 1980년의 일이다. 과거 북서울꿈의숲 자리에 있었던 놀이공원인 드림랜드가 1987년 즈음에 생기고도 다소 시간이 걸려서야 커다란 5차선 도로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에 당연히 장위동에서 도심으로 가자면 크게 돌아가야만 했다. 그에 비해 성북동은 삼청터널을 통해서든, 명륜동으로 질러서든, 종로 도심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이것이 결국 두 동네의 운명을 갈랐다.
결국 시간이 지나며 장위동은 낙후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낙후되었냐면, 지금 오동근린공원에 있는 전파탑은 과거 소출력 TV 중계소로 난시청 가구의 TV 시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을 정도다. TV까지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처참한 상황으로 낙후된 이후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지금은 다행히도 그런 상황은 아니어서 무선 통신 거점 기지국 설비만 들어서 있다.)
그런 이유로 여러 번의 재개발 논의가 장위동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러 이유로 진행되었다가 무산되기를 여러 번 하여 겨우겨우 광운초등학교에 가까운 동방고개 밑쪽이 우선 재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재개발 공사는 장위동 전역에서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재개발이 거의 무산되어 버린 곳이 발생했다. 동방고개 위쪽이었다. 이 마을을 이대로 둘 수도 없었다. 서울시는 새로운 대책을 강구한다. 바로 “도시 재생”이다. 기존의 겉보기는 남긴 채로 소규모 주택을 리모델링/재개축하고, 인프라를 재정비하여 낡은 도시를 “재생시키는” 기존 재개발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그 실험의 장소로 뽑힌 곳은 장위동, 그리고 창신동이었다.
이 장위동에 도시재생이 진행 된 지도 다소 긴 시간이 흘렀다. 겉보기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어 보이는 듯해도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제일 큰 변화는 역시 도서관과 주민 복지시설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장위동 외곽에 동북선 경전철이 들어서며 (창문여고/북서울꿈의숲) 드디어 지하철이 지나간다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장위동의 미래는 이전과 다를 것이다.
[석관동 –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의릉 길을 따라서]
장위동에서 돌곶이역 사거리로 자전거 바퀴가 향한다. 돌곶이역 사거리에는 이렇게 석관동의 유래가 커다란 바위 위에 새겨져 있다.
요즘의 석관동을 나타내는 키워드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유독 눈이 가는 것은 바로 ‘대학가’와 ‘도시재생’이다. 이유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때문이다.
1992년 한국예술종합학교는 기존의 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 건물을 허물고 인근 부지에 건물을 지었다. 게다가 가까운 곳에 조선왕조의 능인 의릉이 위치해 있어 함부로 부지를 활용하거나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겨난 대학에는 젊음이 꽃피기 시작했다. 학교 주변이 조금씩 활기를 띠었다.
덕분에 석관동은 자연스레 ‘도시재생’이 되기 시작했다. 대학교 외곽을 따라 학생들을 위한 식당, 카페, 이어서는 커뮤니티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직접 만든 커뮤니티가 생겨났으며, 이들이 석관동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의릉문화축제가 생긴 2017년 이후에는 지역 주민들도 나섰다. 석관동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석관동이라는 곳을 재발견하게 된다.
[월곡동 – 옛날에도, 지금에도, 달의 동네.]
누가 언제 지었는지 몰라도 월곡동이라는 이름에는 묘한 감성이 있다. “달의 계곡”이라니. 하지만 한때는 달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서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던 시절도 있었다. 바로 달동네이다.
요즘 월곡동에 사는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 종암동 집에서 월곡동 방향으로 눈을 틀면 (월곡동과 가까운 종암동은 과거 종암2동이라 불렀다) 월곡산 (오동근린공원) 방향으로 작은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있는 풍경을 보곤 했었다, 물론 그게 전부 판잣집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다. 신기하게도 밤이 되면 그 산마을은 완전히 깜깜한 채로 아주 약간의 보안등 불빛만이 빛나고 있었는데, 가끔 보름달이 뜰 때면 그 풍경이 살짝 무섭고도 낭만적인 풍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랬다. 누군가 그 풍경을 보고 “달의 계곡”이라는 동네 이름을 지은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언젠 한 번 누군가 내게 “월곡동은 언제 즈음부터 이런 모습으로 바뀌었나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 사는 주민으로서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지금 보이는 월곡역 있죠? 이거 생기고 나서요.” 월곡역. 지난번 길음동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길음역이 들어온 것은 길음동의 변화 중의 하나였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나 그리 큰 변화까지는 아니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월곡역은 다르다. 왜냐면 나는 2001년 처음 월곡역이 들어섰을 때의 그 주변 동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역은 세련되게 지었으나 그 주변의 집들과 가게들은 굉장히 허름했었다. 그나마 나은 건물이라고는 주택은행 건물이었는데, 내 기억으로 이곳에는 복권 사러 온 사람 빼고는 들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거 복권은 지금과는 달리 은행들이 관리했었는데, 그중에서 주택은행은 주택복권, 그리고 초기 로또복권을 판매하던 은행이었다) 게다가 정릉천은 지금과 달리 정비되지 않았으며, 2000년대 초 몇 번의 집중호우가 났을 때 정릉천에 붙어있던 주택가에는 진짜로 침수피해가 발생하여 거기 살던 초등학생들이 재해 공가 처리를 받은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월곡역이 생기고 몇 년이 지나자 동네 자체에 커다란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주상복합 아파트가 지어지고, 대형 할인점이 들어섰다. 동덕여대로 들어가는 길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월곡역 인근이 달라지자 연이어서 다음 역인 상월곡역 일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지어지는 곳은 아파트가, 그렇지 못한 곳들은 도시재생 지역이 되어 마을이 재정비되었다.
지금의 월곡동은 어린 시절에 보았던 밤 풍경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신 월곡역 주상복합 아파트, 그리고 내부순환로와 북부간선도로 고가도로의 불빛, 그리고 수많은 차의 불빛, 그리고 그 불빛 위에 걸린 달은 이전에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월곡동은 그 옛날도, 그리고 2019년의 막바지인 지금도 여전히 “달의 계곡”이다.
[에필로그 – 다시 종암동으로 돌아와서]
지난 5월 즈음부터 시작하여, 장장 7개월에 달하는 성북구에 관한 이야기가 드디어 종암동으로 다시 돌아와 끝을 맺었다.
이제 곧 이곳에서 살아온지 30번째 해를 향해 간다. 이러한 시점에서 내가 늘 사는 동네, 그리고 늘 가는 동네, 그리고 같은 성북구라도 잘 가 보지 못한 동네를 구석구석 다니면서 각 동네의 역사를 돌아보고 오늘의 모습들을 보면서 역으로 나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도 있던 시간이었다.
이 시리즈가 끝나면 다음은 뭘 주제로 해야 할지 아직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때 하기로 하고, 지금은 종암동에서 이 긴 이야기를 마치며 잠시 쉬려 한다.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하자면, 보통 길은 “걷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새로운 길을 만들 때도 있고, 이미 나 있는 길을 걸어도 새로운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올해가 끝나가기 전에, 아니면 내년이 새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 기분을 한번 여러분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시리즈를 마칩니다. 읽어주셨던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글/사진 성북마을기자단 송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