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역 사거리를 지나서 성북구청으로 올라 가보자. 성북구청이 있는 지금 이 위치부터는 삼선동이다. 그러나 성북구청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성북구청 바람마당과 그 건너편 돈암동 성당부터는 삼선동이 아닌 동선동이다. 문제는 또다시 돈암동 성당에서 “로데오거리”라 불리는 돈암제일시장이 있는 곳부터는 동소문동이다.
성북구청이 있는 한 블록 안에서 무려 동이 3개로 나누어 지는 이런 매-직(…)이 있을까 싶다. 거기다가 이상한 것은, 왜 동소문동, 동선동 경계면 안에 왜 “돈암동 성당”이 있는 것이며, 성신여자대학교의 역사와 캠퍼스를 언급할 때 “돈암동에 학교터를 잡았다.”라고 하며, 아예 메인 캠퍼스 명칭도 “돈암수정캠퍼스”이지만 정작 수정캠퍼스의 정문과 학생회관은 동선동에 걸쳐있는 이 수수께끼와 같은 부분들이 함께 따라다닌다. 하지만, 이것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성북구 삼선동과 돈암동의 복잡한 속사정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래전, 우리가 성북구청과 성북천 사거리를 둘러싼 4개 동은 원래 돈암동의 변두리 구역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성북구에 사는 주민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오래전의 돈암동은 지금의 개운산을 중심으로 아예 주변 동네를 개운산의 절반 이상 먹은 형태의 동 구조를 가졌고, 현재 동소문동 성북구민회관 지역, 그리고 한성대학교의 삼선동지역, 개운산근린공원을 생각해볼 때, 크게 보면 돈암동이라는 동네는 낙산-북악산-개운산에 둘러싸인 형태를 했다는 것이다. 이게 일제강점기 – 대한민국 1공화국까지는 이렇게 유지가 되었다. (정확하게는 1962년까지) 왜냐면, 정작 당시 옛 돈암동 지역은 미아리고개에서 시작하여 혜화문과 삼선교 지역까지 넓은 땅은 있었으나 사람은 많지 않은 구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1963년이었다. 60년대에 삼선동에 주택가가 점진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옛 돈암동의 넓은 공간을 서울시에서 다 관리하기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성북구청장이 민선이 아닌 관선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지역 관리는 정부, 그리고 서울시가 다 하고 있었다) 결국 서울시와 성북구는 결단을 내린다. 되넘이고개를 넷으로 나누기로.
그렇게 하여, 삼선교가 위치했던 지역은 자연스럽게 삼선동의 이름을 가지고 쪼개졌다. 삼선교의 정 반대, 혜화문에 가까운 지역은 혜화문의 다른 명칭인 동소문의 이름으로 쪼개졌고, 삼선동과 동소문동의 어중간한 지역은 두 동네의 이름을 합쳐 동선동으로 쪼갰다. 그리고 그 돈암동마저 북악산에 가까운 곳과 개운산의 가까운 곳을 둘로 쪼개 돈암1-2동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하여 지금의 저런 복잡한 지형이 만들어졌다. 당연히 과거 “돈암동”일 때 만들어진 학교, 성당, 교회들은 돈암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정작 1963년이 지났을 땐 돈암동이 아닌 곳에 있게 되는 아이러니를 지니게 되었고.
하지만, 막상 성북구 주민인 나도 정작 이곳에 오면 삼선동-동선동-동소문동의 경계를 거의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게다가 외부 사람들도 오히려 돈암제일시장 로데오 거리가 동소문동에 있다는 것을 모를 때가 많다. 그저 “성신여대 앞 로데오 거리”라는 이름으로 기억할 뿐.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스와 지하철이 연결되면서 동은 나뉘었으나, 이곳의 생활권은 한 덩어리를 가진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동의 경계가 합쳐지진 않았다. (그나마 동소문동이 동선동 주민센터 담당 지역으로 들어가며 사실상 동소문동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지만, 행정구역상으론 존재한다) 아니, 이젠 합치는 것이 각 동의 사람들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나보단 둘, 둘보다는 셋이 낫다고, 동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행정에 필요한 인원도 2.5배로 늘어났고, 지방선거 실시 이후 구의원도 가-나 선거구로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렇게 동을 4개로 나누어 놓았어도, 사람들의 생활권역은 교통의 발달과 주거지의 확대로 오히려 더 옛날 뭉쳐진 커다란 돈암동 시절을 연상케 할 정도로 하나로 합쳐져 간다는 것을. 아니, 이제는 그렇게 나눠놓았던 동의 경계마저도 점점 묽어진다는 것을. 그렇게 점점 복잡한 모양의 각 동의 경계도 무의미해지는 이 엄청난 아이러니를. 성북구청을 기점으로 갈린 동의 경계선에서 발견한다.
[글/사진 성북마을기자단 송의현]